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일스 데이비스 (문단 편집) === 모달 재즈와 섹스텟 === 한편 파토난 퀸텟을 뒤로 한 채, 마일스는 1957년 가을부터 유럽 순회 공연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 중요했던 것은 공연 보다는 프랑스 영화감독 [[루이 말]]이 제의한 영화음악 작업이었다. 말은 '사형대의 엘리베이터(Ascenseur pour l'échafaud)'의 촬영을 막 끝마친 상태였는데, 마일스로서는 첫 영화음악 작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말은 미리 철저하게 계획되어진 작곡과 연주 보다는 즉흥적인 연주로 얻어진 재즈 음악을 도입하고 싶어했고, 마일스는 편집된 영화 필름을 수 차례 보면서 작업 구상에 몰두했다. 결국 12월 4~5일에 르네 위르트르제 쿼텟과 함께 가진 녹음 세션에서 영화에 쓸 음악이 모두 녹음되었는데, 마일스는 여기서 코드 몇 개 혹은 아예 코드 없이 진행되는 상당히 단순하고 추상적인 형태의 음악을 도입하는가 하면 베이스나 드럼 만으로 긴장을 고조시키는 등의 실험을 행했다. 미국에 돌아온 뒤, 마일스는 이 때의 경험을 살려 새로운 그룹을 결성했다. 퀸텟에서 연주했던 콜트레인과 갈랜드, 체임버스, 필리 조 존스가 모두 복귀하고 새로이 알토 색소폰 주자로 [[캐논볼 애덜리]]가 영입되어 섹스텟(6중주단)이 탄생했다. 마일스는 이들에게 복잡하고 다양한 코드로 이루어지는 비밥 어법 대신 몇 개의 한정된 음계와 코드 만으로 연주하는 새로운 시도를 해볼 것을 요구했다. 음계도 기존의 장단조가 아닌, 그 이전의 체계였던 [[선법]](mode)을 응용했다. 섹스텟의 첫 녹음은 1958년에 Milestones 라는 타이틀로 발매되었는데, 아직 수록곡들은 기존의 하드밥이나 전통적인 블루스에 기반을 둔 곡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중 한 곡인 타이틀곡 Milestones에서는 선법과 적은 코드에 입각한 연주가 선보여졌고, 평론가들은 이 곡에서부터 마일스가 본격적으로 모달 재즈를 시작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사실 모달 재즈의 실마리는 마일스가 혼자 제시한 것은 아니었고, 이미 [[빌 에반스]]와 길 에반스를 비롯한 뮤지션들이나 수완 좋은 편곡자이자 빠삭한 이론가였던 조지 러셀의 논문 등을 통해 제시되어 있었다. 클래식 교육을 받았던 빌 에반스는 [[클로드 드뷔시|드뷔시]]나 [[모리스 라벨|라벨]] 등 프랑스 근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통해 선법의 매력을 이미 체득하고 있었고, 러셀은 기존의 음계 위주 재즈가 아닌 몇 개의 음으로 제시할 수 있는 수많은 음계와 코드의 가능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어법에 대한 가능성을 썰로 풀어놨다. 마일스톤즈 발표 후 섹스텟에서는 몇 차례의 인원 조정이 있었는데, 필리 조 존스와 갈랜드가 탈퇴한 뒤 지미 콥이 드러머로, 빌 에반스가 피아니스트로 영입됐다. 이 시기 백인 피아니스트 빌의 영입이 열띈 논쟁을 유발했는데, 마일스는 이미 The Birth of Cool에서 흑백 혼합 밴드를 이끈 바 있었고 실력과 아이디어가 좋다면 인종은 별 상관 없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새로운 라인업의 섹스텟은 1958년의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 녹음을 섞은 1958 Miles 라는 음반을 처음 시장에 선보였다. 실제로 에반스는 마일스에게 선법의 구체적인 의미를 가르쳐 주었고, 자신의 조용하면서도 감각적인 연주법을 통해 마일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이 1959년의 [[Kind of Blue]] 라는 앨범이었고, 여기서는 [[윈튼 켈리]]가 피아니스트로 참가한 정통 블루스 곡이었던 Freddie Freeloader를 제외한 모든 곡이 모달 재즈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첫 곡인 So What은 도리안(Dorian) 선법[* 장조음계(Major Scale)의 두번째 음인 레(Re)음을 으뜸음(Root)으로 하는 선법(Mode). 구성음은 Re-Mi-Fa-Sol-La-Ti-Do 일곱 음이다.]을 기반으로 작곡된 매우 절제된 테마를 통해 본격적인 모달 재즈의 유행을 알린 것으로 유명하다. Kind of Blue는 상업적으로도 그 때까지 콜럼비아에서 나온 마일스의 앨범들 중 최고의 판매 실적을 올렸고, 동시에 수많은 논쟁과 모방자들을 낳았다. 심지어 그 특유의 단순성과 엄격함 때문에 [[테리 라일리]]나 [[스티브 라이히]] 등 소위 미니멀리즘 계통의 작곡가들도 사로잡았고, 재즈 뿐 아니라 당대 음악 전반에 영향을 끼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길 에반스와 작업한 앨범들과 모달 재즈를 선보인 두 섹스텟 앨범으로 마일스는 재즈계의 [[본좌]]에 등극했지만, 이 때 마일스의 인생에서 가장 심한 논란을 불러 일으킨 폭력 사태에도 휘말렸다. 1959년 8월 말 뉴욕의 버드랜드 클럽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는데, 백인 [[경찰]]들과 시비가 붙어 구타당한 사건이었다. 법정에서는 피고 마일스와 원고 경찰 어느 쪽에서 어그로와 다굴이 시작되었느냐에 대해 격한 논쟁이 오갔다. 이 사건은 결국 마일스가 무죄 판결을 받으며 종결됐지만, 당시 불거지고 있었던 미국 내 흑백 인종 문제의 공론화와 더불어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확산됐다. 하지만 마일스는 흑인의 의식을 깨우쳐줬네 뭐네 하는 말에도 별 신경 쓰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